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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박영업과 인간관계
  Author : 황성혁     Date : 08-12-03 09:29     Hit : 17043    
 
 
지난 10월30일 선박영업과 관련하여 인하대학에서 두번째 특강을 하였습니다. 선박영업에 관하여 특강을 계속 하고저 합니다. 선박영업과 협상 방법, 선박영업과 음주 문화, 선박영업과 외국어 구사, 등으로 계속해서 하나의 책으로 발전 시켜 볼까 합니다. Comment 주십시요. 
                         
                       

선박영업과 인간관계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김상현 교수님의 고마운 배려로 여러분을 두번 째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 여러분들과 선박영업과 사회 환경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뒤 청강하신 많은 분들이 과분한 칭찬을 해 주었고 더욱이 조선이 아닌 우주항공, 나노, 섬유학과 학생들로부터의 적극적인 호응에 놀라움과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선박 영업은 그 규모가 크고 모든 종합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어서 다른 학과 후배들에게도 들을 거리가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두번째 주제로 “인간관계는 어떻게 선박영업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가” 라는 화두를 놓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끔 조선공업에 관계된 분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조선공업은 인간 개개인의 성취를 허용치 않는다.” “개인이란 거대한 기계의 조그만 부속일 뿐이며 선박이라는 거대한 크기에 비해 무시해도 좋은 사소한 한 구석일 뿐이다” 라는 말들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선박 영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버려야 할 생각입니다. 이것은 선박영업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영업을 하는 사람도, 더 나아가서 영업뿐 아니라 설계를 하는 사람도 생산을 하는 사람도, 관리를 하는 사람도, 모든 사람들이 제일 먼저 버려야 할 잘못된 편견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말 그대로 여러분들은 스스로 하찮은 부속이 되고 무시해도 좋은 미세한 보이지 않는 구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선박영업은 개개인의 인간적 영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래의 금액이 거대하고 내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그 거래의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운회사를 운영하는 선주들 중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시장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이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르내리고, 선박을 팔고 사는 것이 그 회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선박을 건조하거나 혹은 중고선을 사거나 혹은 선박을 용선하는 경우 그 액수가 엄청나서 모두 한 순간의 결정이 엄청난 행운을 불러오거나 결정적인 파멸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해운은 거친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입니다. 자칫하면 배가 침몰하거나 파손되어 큰 재산을 잃는 것은 물론 그 배위에 근무하던 직원들의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 하루하루의 사업을 영위해가는 선주가 좀 특이한 습관이나 별난 사고방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럴 때 그들의 거래 상대는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가장 결정적 요소가 됩니다.

저는 선박영업을 하는 동안 그런 수많은 선주들과의 거래를 통해 인간관계를 이루고 많은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들처럼 유별나게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과 정반대로 아주 정상적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1978년 1월 런던지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때 런던은 세계 조선 해운산업의 중심이었습니다. 런던지점은 아프리카 아라비아 유럽을 총괄하기도 해서 구아 본부라고도 부르고 있었습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의 한 회사였던 카나다의 FEDNAV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BULK CARRIER로서는 최대의 크기였던 14만톤급 CAPE SIZE를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를 런던에 있는 나를 통해서 협상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나다는 우리회사의 뉴욕지점의 관할 아래 있었습니다. 내게 신임을 두고 나와 협상하겠다는 것은 내게는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뉴욕지점으로서는 자기들의 입지를 잃고 자기들의 일감을 빼앗기는 것이어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불필요한 구설에 말려 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뉴욕지점과 이야기 하시면 제가 옆에서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좋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당히 언짢아 하며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미스터 황, 이것은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 할 일이 아니예요. 우리는 이사회에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와 일하는 것을 이사회에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리면, 그 프로젝트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조선소에 주겠다는 어투였습니다. 저는 맡겠다고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본사와 뉴욕지사를 설득했습니다. 계약은 런던을 통해서 성사되었습니다. 꼭 나 개인과 협상을 하겠다는 것은 제가 선주만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평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믿음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늘 생각합니다. 그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그런 진지한 자세는, 제가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때 언제나 첫 번째로 갖게 되는 화두가 되었습니다.

TK SHIPPING의 TORBEN KARLSHOEJ 회장과의 인간관계를 언제나 기억 합니다. 그는 해운시장에서 10만톤 급 AFRAMAX TANKER의 새로운 장을 연 사람입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태평양 시대를 열기까지 기름의 움직임은 대서양과 인도양 중심이었습니다. 중동과 미국, 중동과 일본 사이의 기름 수송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주로 25-30만톤급 VLCC, 15-20만톤급 SUEZMAX 등 대형 탱커가 수송의 주종이었습니다. 태평양 연안의 수송은 정해진 패턴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미국 서부해안과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오스트렐리아를 엮는 태평양 중심의 AFRAMAX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금융을 써서 일본 조선소에서 끊임없이 배를 짓고 있었습니다. 한국조선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에서 배를 지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는 조선공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침체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를 좋아했습니다. 조선소에서 대모도 격렬하게 하지만 일도 열심히 하는, 새로운 일에 대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그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금융기관도 그가 한국에 발주하는데 금융을 보조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는 사업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성공을 이루었지만 가정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두 번째 이혼을 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매일 밤 그는 소련산 순수 보드카 두 병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저녁 파티를 거를 수가 없었습니다. 회사의 계약관리부는 그를 위해 좋은 보드카를 확보하는 일에 많은 신경을 쏟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출장에서 돌아와 보드카에 절어 있는 그를 발견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고객이고 장래에 가장 큰 고객이 될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망쳐간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를 그날 저녁 파티에 초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 파티를 마친 뒤 술 마시기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울산의 요정을 나서면 한길은 술집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길에 있는 바마다 들러서 위스키 원샷을 하는 것입니다. 길가의 면한 일층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층 삼층까지 들르며 원샷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뭐 내기지” 내가 대답했습니다. “술 끊기” “이기면” “술 끊기”. 100미터도 가기 전 우리는 길가에 큰 대자로 들어 누웠습니다. 그가 먼저 큰 소리로 떠들었습니다. “술 끊기야, 술 끊기야” 우리는 그날 직원들에 의해 업혀서 돌아왔는데 그는 술을 끊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내가 조선소에 있는 한 보드카 두 병씩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남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있은 뒤 형제가 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지요. 그런 뒤 우리들이 조선소에 머무는 주말에는 경주의 남산도 오르고 주변의 사적지나 명승지도 돌아 보았습니다. 경주에서 신라의 숨결도 같이 나누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배 이름은 NAMSAN SPIRIT, SHILLA SPIRIT, ULSAN SPIRIT로 지어져 갔습니다. 우리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피붙이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나 믿어 주었습니다.

저는 배를 팔러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중요한 선주들과 형제 같은 인간관계를 맺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대학에서 조선을 전공했고, 배를 잘 알고, 조선공업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으며, 그 대단한 선주들과 대등한 관계에 있음을 입증했고,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홍콩의 최대선주의 한 사람인 WAHKWONG 해운의 GEORGE CHAO 사장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가까웠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는 조선과 해운시장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배를 팔러 다니는 우리는 끝없는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선박시장은 큰 파도와 같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법입니다. 선주는 밑바닥에서 배가 가장 쌀 때 배를 사고저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지금이 밑바닥이다 놓치지 말아라 하고 선주를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80년대에는 내가 그렇게 이야기한 다음날 혹은 다음달에 다시 선박의 가격은 떨어졌습니다. 계속 떨어 졌습니다. 계속 거짓말만 하고 다닌 셈입니다. 문제는 그때에 벌어졌습니다. 전통적인 해운회사들이 아닌 투기꾼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자금 줄이 튼튼했던 그들은 그때가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투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닥에서 사두면 배가 인도될 때쯤 해서 천정으로 오를 것이고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배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정 반대로 인도시기가 다가 왔을 때 선가는 오르기는커녕 끝없이 떨어져, 투자금액보다 몇 십 퍼센트씩 낮게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해운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은 선가가 내려가더라도, 새 배를 그들이 보유한 선단에 끼워 운항을 하면 손실을 약간 물 타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운과 관계없던 그들은 은행 빚을 갚기 위해서 배를 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전보다 훨씬 낮은 값으로 팔았습니다. 따라서 전 세계의 배 값은 그 바닥을 알 수 없을 지경으로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은행 빚을 갚을 수 없었던 그들은 파산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파산은 그들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융자를 해준 은행도 경영위기를 맞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튼튼했던 BANK OF AMERICA 에 위기가 닥친 것도 그때였습니다. 최악의 경우가 닥쳐 왔습니다. 건실한 해운회사에 까지 그 불똥이 튄 것입니다. 은행은 해운회사에게 돈을 빌려주며 선박을 저당 잡게 됩니다. 그러나 선박의 시장 가격이 자꾸 떨어져서 담보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은행은 드디어 담보가치를 융자금액만큼 올리라는 최후 통첩을 선주들에게 내렸습니다. 선박이 그들이 갖고 있는 재산의 전부였던 많은 해운회사도 결국 파산신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WAHKWONG 해운도 마찬가지 운명이었습니다. 사장이었던 GEORGE CHAO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투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계속 편지를 썼습니다. WAHKWONG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있을 때 편지를 썼습니다.
“GEORGE, 당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되지 못할 일은 없다고 확신한다. 모든 문제는 당신의 경영능력과 관계없이 투기꾼들과 금융시장 자체의 결함으로 비롯된 것이다. 조금만 더 참고 지금처럼 노력해라. 당신이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이 어려움을 이겨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좀 좋아진다는 소식에 또 편지를 썼습니다.
“상태가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당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보아 모든 운영이 정상화 되리라는 것을 나는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이제 어려운 시기는 곧 지나갈 것이다. 좀 더 참고 건강에 유의하기 바란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그가 오랫동안 소유해 오던 빌딩까지 팔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나는 또 썼습니다.
“GEORGE, 당신을 도울 방법이 없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충고컨대 일상 업무에서 잠깐 손을 때고 한국으로 훌쩍 떠나 오는 것이 좋겠다. 여기 당신의 친구들과 한 일주일쯤 쉬고 나면 몸과 마음이 다시 활력으로 재충전되지 않겠는가.”
물론 나의 편지는 그의 어려움을 풀어줄 힘도 없었고 그를 한국에 와서 쉬고 가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긴 뒤 그는 나의 편지를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시기의 친구는 진정한 친구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처음 조선소를 지으면서 배를 팔러 다닐 때 황당한 일이 많았습니다. 나이제리아에서 세계조선 역사상 제일 액수가 큰, 그것도 현금 거래로 배를 짓는다는 계획이 섰을 때, 우리는 용감하게 뛰어 들었습니다. 처음 나이제리아의 국영해운 회사나, 교통부를 찾아 갔을 때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이 어땠는지 상상이나 하시겠습니까. 한결같이 “뭐 한국이 최첨단 선박을 짓는다고. 당신들에게 주기 전에 우리가 짓겠다” 였습니다. 조선소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자본도 없던 그들이 우리를 미개인 취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그때 미개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인도에 갔을 때 인도 국영해운 회장은 인도 서부해군사령관을 지낸 위풍당당한 제독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보며 측은한 듯 말했습니다. “미스터 황, 만약 말이오, 내가 한국에 발주를 한다는 결심을 한다면, 한국의 현대조선보다 백 년은 더 경험이 많은 인도의 조선소들을 어떻게 설득 해야 하지요.”
저는 정공법을 택했습니다. 인도는 신분제도가 확고한 나라로 대화의 상대가 자기와 같은 계급이 아니라 생각하면 얼굴도 마주 보지 않는 곳입니다. 나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 때 그 프로젝트를 따지 않으면 몇 만 명의 조선소 직원들이 일손을 놓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인도대륙의 남단에 있는 코친 조선소는 현대중공업과 같은 해에 조선소건설을 시작했다. 8년이 지난 지금 그곳에서는 첫 번째 주문 받은 한 척의 VLCC와 아직도 씨름을 하고 있다. 현대는 어떤지 아는가. 그 동안 VLCC는 물론 세계최첨단 선박을 200여 척을 성공적으로 인도했다. 이런 사실들은 회장께서 인도 조선소를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되지 않겠는가.” 성격이 군인답게 솔직담백 했던 회장은 책상을 치며 동의하였습니다. “그거야. 바로 그거야. 인도는 이제 한국에 배워야 돼.” 그는 한국의 성공을 거듭하는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의 진행상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현대그룹의 한국 경제 개발에 있어서의 기여도를 물었습니다. 현대중공업의 한국 경제에서의 위상을 물었습니다. 제가 설명을 마친 순간 나는 그와 동일한 신분이 되었고 그가 그 직책에 있는 동안은 물론 그가 국영해운을 떠나서 인도북부의 주지사로 재직할 때 까지 짙은 우정을 계속 했습니다.

우리가 시작했을 때 우리의 구호는 “모르는 것이 힘이다” 였습니다. 알고서는 주눅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적인 구호였습니다. 세계는 우리를 동족상잔의 전쟁을 계속하는 나라, 굶주림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나라, 외국의 구호 식량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나라 정도로 취급하였습니다. 선박이라고는 몇 천톤 짜리 최고 1-2만톤 정도를 간신히 만들 수 있는 나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최첨단의 VLCC를 만들겠다고 하니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가난함과 부족함과 무지함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좀 더 잘 살아야겠다는 좀 더 나은 조선소를 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운도 좋았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그 어려운 시절로 되 돌아 가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둬도 옛날로 되 돌아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마음 먹기에 따라 우리는 다시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의 삶은 주어진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심하면, 우리가 손 놓으면 우리의 현재의 풍요는, 우리가 누리는 세계 제일의 조선국 입지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결코 다시 가난해 져서는 안됩니다. 조선공업을 우리 손에서 놓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다. 이 책임을 여러분들의 든든한 어깨에 놓아 드리겠습니다. 우리 민족 특유의 개방적이고 친화적인 인간관계를 찾아 내고 개발 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보십시요.  인간 관계입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관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맥, 지연, 학연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간을 만들고 상대방 인간에게 다가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감동을 줄 수 있으면 그 인간 관계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해답은 인간 관계에 있습니다. 선박영업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장래, 여러분의 삶이 모두 여러분의 깊고 넓은 인간관계에서부터 활짝 피어 날 것입니다. 스스로 훌륭한 조선인, 관리자 그리고 인간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