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Essays > Korea Essays

 
 
 
   
  COTY 화장비누
  Author : 황성혁     Date : 08-02-05 15:14     Hit : 15902    
 
 
대한조선학회지 제44권 제4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COTY 화장비누

 

몇 해전 겨울 어느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할인점을 갔었다. 할인점에서 내가 할 일은 카트를 끄는 일이요 물건을 담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지만 나는 그날 하지 않던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비누 한 박스를 슬쩍 카트에 담은 것이다. 아주 허름한 인쇄로 COTY 화장비누라고 이름이 붙어 있었고, 포장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가장 검소한 종이 상자로 되어 있었다. 슬적 뚜껑 속을 들여다 보았더니 스무 개의 오랜지 색 COTY 화장비누가 얇은 반투명 종이로 싸여 있었다. 물론 개별 박스는 없었다. 그것조차 좋았다. 그 검소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값은 왜 그리 쌌던지. 스무 개가 삼천 원이었다. 상자도 포장을 해 놨다는 눈가림일 뿐이었고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두 손으로 잘 받혀 들어야지 한 손으로 들다가는 속에든 비누들이 다 쏟아질 형편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마음속에 박혀 있던 코티 화장비누에 대한 환상에 빠져 들었다. 그 상표가 흘려 쓴 필기체 소문자 coty가 아니고 투박한 인쇄체 대문자 COTY 였지만 그저 코티라는 단어가 반가워서 한 박스를 슬쩍 아내의 장바구니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계산을 하며 아내가 물었다. “이건 뭐야.” 나는 시침을 떼고 전혀 관심도 없는 듯이 전혀 속을 훔쳐보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아 코티 비누야” 그리고 나의 코티 화장비누와의 일년 고생은 시작되었다.

“라이명생 오리진 오이길 곧가내.” 육이오 전쟁 중 마산은 인민군에게 유린되지는 않았지만 산 너머까지 그들이 들어 와 있었다. 학교는 부상병들을 수용한 병원이 되었고, 가끔 이북 비행기의 공습 경보도 있었고, 마산 앞 바다는 함포사격까지 준비한 해군 함정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한길은 먼지를 뒤집어 쓴 군용트럭들의 주차장 같았다.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우리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한길로 골목길로 몰려 다녔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깡통 차기, 자치기, 딱지치기와 술래잡기를 했다. 길가에 오가는 미군들의 추잉검을 얻어먹었고 미국제 그 달디 단 초콜릿 맛도 제법 보았었다. 그때 우리들의 구호가 “라이명생 오리진 오이길 곧가내” 였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서면 집 앞 은자네 높고 두꺼운 돌담 앞에 세워진 자그마한 포교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요한복음 14장 6절 “내가 곧 길이오 진리오 생명이라” 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꺼꾸로 읽어 우리의 구호로 삼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구호를 외치며 근처 골목을 돌면 이집 저집에서 또래들이 모여들어 깡통차기건 자치기건 금방 한 팀을 만들었다. 그 포교판은 피난 내려와 있던 마산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세운 것이었다. 우리동네에 천막교회를 세우고 학교에서 수업을 하며 천막에서 기거하며 교회를 운영하고 계셨다. 이북에서 피난을 온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연약하게 생긴 분이셨다. 내가 중학교를 갔을 때도 국어를 가르치셨다. 매사에 꼼꼼하시고 아름다운 시를 읽어 주시고 시 감상법을 실감나게 가르치셨다. 그 어려운 피난 생활 중에도 그 분은 시를 쓰셨고 세상이 좀 안정되자 시집도 내셨다. 그러나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선생님 곁에 서 있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때문이었다. 내 친구의 누나였다. 우리보다는 열살 쯤 위로 내 친구 하나 달랑 데리고 전쟁 통에 피난을 내려와 내 친구의 어머니처럼 친구처럼 작은 방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키도 크고 얼굴이 뽀얗고 아는 것도 많은 그녀는 언제부터였는지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은 선생님 곁에 서기 시작했다. 천막교회에서 풍금을 타고 성경 강의도 돕곤 했다. 우리는 예수쟁이가 아니었지만 그 누나 때문에 천막교회의 단골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하루에 세수를 열 번도 더 한데” “선생님은 코티 화장비누로 세수를 한데.” “누나는 선생님의 코티 화장비누 냄새를 좋아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누나와 선생님은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 전쟁 통에 내게도 코티 비누를 만져 볼 기회가 한두 번은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쓰는 것이고 나 같은 선머슴아이가 쓰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가끔 한번씩 그것으로 눈에 띄지 않게 세수를 해 보았다. 그 부드럽고 상쾌한 냄새와 연하게 녹아 거품을 내며 피부를 녹진하게 하던 코티 비누는 내게 그 시절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향기로 내 후각에 자리잡았고, 그 어려운 시절의 모든 멋진 것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할인점에서 장바구니를 차에 싣고 돌아오는 나는 행복했다. 마치 좋은 화장비누 구경도 못한 사람처럼 가슴을 울렁이며 집에 가서 코티 화장비누 풀어 놓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자랑스럽게 상자에서 비누 하나를 꺼내 세면대에 올려 놓았으나 아무도 거기에 손을 데지 않았다. 코티 화장비누는 곧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것은 향수 냄새도 나지 않았고 거품도 일지 않았고 색깔은 멋진 황금 오랜지 색이었지만 빨래 비누 보다 가치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내가 골랐으니 내가 책임 질 수밖에 없었다. 두 달이 지나도 하나 쓰기가 어려웠다. 샤워를 하며 머리에 필요 이상으로 문지르고 이태리 수건에 힘껏 비벼댔지만 요지부동으로 줄어들지가 않았다. 세탁비누처럼 화장실 걸레 빨 때도 식구들 눈치 봐 가며 그것만 썼다. 몇 년이 걸려도 없앨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이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비누가 급작스럽게 물러졌던 것이다. 손도 대기 전에 녹아 내렸다. 한 달에 세 개씩도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 겨울이 돌아왔을 때 나는 코티 화장비누와의 인연의 끈질긴 줄을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코티 비누와의 해후는 내게 괴롭지도 않았고 싫지도 않았다. 내가 돌보아야 할 한 시절의 기념물처럼 혹은 숨겨놓은 보물처럼 함께 지냈었다. 코티 비누의 마지막 끄트머리가 없어 지던 날은 짙은 아쉬움 까지 느껴지던 것이었다.

그 해 겨울에도 우리 집 마당의 매화 나무는 그 무성한 잎의 색깔을 잃기 시작했고, 한잎 두잎 그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벌거벗은 가지로 남았다. 초봄의 황량하던 뜰을, 하루 아침에 찬란한 환희의 빛으로 바꾸어 놓던 황홀한 매화의 생명력과, 한 여름의 무성한 잎으로 자랑하던 풍요를, 그리고 가지가 휘도록 맺던 매실의 결실의 추억을 모두 내려 놓고, 거추장스런 장식 없는 깔끔한 알몸으로 돌아 가던 것이었다. 매화나무에 얹히는 세월과 생명의 흐름을 보며, 그 생명의 추억을 때 맞춰 내려 놓는 매화나무의 지혜를 보며, 나는 내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코티 비누와의 나의 인연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코티 비누가 내게 알맞게 내려진 축복 같은 것이라 생각 했다. 마음에 버겁게 껴안고 있는 짐들을 내려놓으라는 계시라 생각 했다. 내가 살며 맺었던 내 몸과 마음을 윽조이는 수 많은 끈들을 풀어 놓으라는 말씀이라고, 세상 살며 끼고 다니던 온갖 집착과 허상을 훌훌 털어 버리라는, 그래서 마음을 한없이 가볍게 해 보라는 은총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아무 군더더기 없는 매화의 등걸처럼 벗는 것이다. 꽃과 잎과 열매의 부질없는 환상을 벗은 매화 등걸은 그렇게 가볍고 한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코티 화장비누와의 일년 동안의 동행은 최소한 나의 한 세대 어릴 적 그 찬란하던 잔영을 마음속으로부터 내려놓는데 한 몫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희도 회한도 내려 놓은 것만큼 나의 육신은 가벼워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화등선의 꿈도 꾸었다.

그러던 며칠 뒤 나는 말끔하던 창 밖 매화 등걸 위에 얹힌 새로운 짐을 보았다. 밤새 내린 순수한 백설이 가지마다 소복히 얹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내게 속삭였다. “짐을 내려 놓는다고?”